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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국립대 김상표 명예교수(작가) 사진 |
[뉴스비타민=류동익 기자]
생성론적 ‘춤’과 공동윤리의 재구성 ㅡ“신은 전선미에 관한 자신의 비전에 의해 세계를 이끌어가는 애정 어린 인내심을 갖고 있는, 세계의 시인이다.”(화이트헤드) 자기 그림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해명할 수 있는 화가는 과연 불행한가? 행복한가?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와 ‘생성철학자’ 들뢰즈 이론으로 무장한 감상표 작가의 화론과 그림 사이 역학 관계를 단정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왜냐하면 아무리 정밀한 자기만의 화론이 있다고 해도, 그걸 곧이곧대로 따르는 작가는 없는 까닭이다. 특히 대부분 작가들의 경우 한자리에 매이거나 정체되지 않거나 계속해서 변모해 나가도록 화가를 추동하는 이율배반적인 매개체가 바로 화론이고 작품들인 까닭이기도 하다.
김상표_영원의 시간-피안화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25
그런 김상표 화가를 지탱하는 유일한 ‘주의(ism)’가 있다면, 일체의 권력 집단과 관료제 혁파를 통하여 제 국가의 해체를 겨냥하는 아나키즘이다. 하지만 근대국가의 허울뿐인 국민국가라는 공동체의 붕괴와 직결되어 있는 아나키즘 자체가 어떤 ‘주의’나 이념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그마저도 곧바로 부정당할 상황에 직면한다. 그의 말대로 아나키즘의 본질 자체가 ‘모든 주의와 주장에 대한 판단중지’를 의미하는 반권력적이고 반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일목요연하게 하나의 틀로 붙잡을 수 없는, 그야말로 ‘틀 없는 틀’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의 회화 세계가 그 증거다. 그는 고정되거나 정형화된 틀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락 없이 이른바 아나키스트에 가깝다, 마치 김수영 시인처럼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는, 철저한 자기부정과 혁명적 쇄신을 영구혁명론자의 정신을 닮아있다. 특히 과연 그래서일까. 그의 회화는 과거나 현재의 시공간에 붙잡혀 있지 않다. 끊임없는 실험과 모험을 통해 미래로 열려 있거나 미래를 열어나가는 과정 속에 있다.
김상표_우정의 공동체1-1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5
최면 같고 마법 같은 다이나마이트의 조각이 내장된 듯 기운생동한 그의 회화들이 그 결실이다. 검도 수련 20년, 태극권 15년의 수련과 내공에서 저절로 배어나올 법한 긴장과 이완의 손가락과 손바닥과 손톱 등 신체의 일부 또는 온몸을 사용하는 그의 그림 세계는 ‘친다’와 ‘치다’라는 자동사와 타동사를 종합하고 넘어서는 ‘춤’에 가깝다. 아니, 그의 춤은 명사적 ‘춤’이 아니라 ‘춤춘다’는 동사적 사건이 더 정확하다. 마치 아원자의 세계에서 본 우주처럼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춤이다. 그의 다양한 형상들은 그런 춤의 유동 속에서 어쩌면 환상(maya)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
김상표_M에게 보내는 편지1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3
그런 그의 그림 세계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이 리듬이다. 자신마저 예측하거나 통제 불가능한 그의 그림 세계는 마치 만물의 변화와 생성처럼 ‘춤’의 리듬을 타고 이뤄진다. 그러면서 이렇듯 ‘춤추는’ 그의 리듬은 맥박이 뛰거나 어떤 알 수 없는 자연적인 원인으로 지면(地面)이 맥박치듯 진동하는 주기적 운동으로서 맥동(脈動)의 형태를 띤다. 동시에 마치 전자 내부에 에너지를 가하는 반복운동처럼 진동하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보통의 상태에서 흥분의 상태로 감정 고조와 공명현상으로 이어진다. 곧 내달리듯 빠르고 세차게 흐르는 물 또는 물줄기 같은 어떤 신명의 분류(奔流) 또는 광활한 여백의 울림이 확인시켜 주는 게 그의 회화 세계다.
그의 그림들이 구체적인 사물보다 하나의 전체 흐름(holoflux)의 형태를 취하거나 행여 식별가능한 개별사물들이 소용돌이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거의 흐릿하거나 뭉개져 있는, 물론 그렇다고 그 자취마저 알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닌 그의 그림들 속에서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건들이 서로 생성자가 되고 파동자가 되어 무형유적(無形有跡)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끊어질 듯 이어지거나 이어질 듯 끊어지는 형상과 흔적, 창조와 피조가 동시체를 이루면서 모든 것들은 연쇄 파동자로서 서로가 서로의 창조자이자 피조물이 되어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면서.![]()
김상표_상호 존재_캔버스에 유채_162.2×260.6cm_2026
김상표의 생성론적 작업은 이처럼 그 어떤 한계 경험을 통한 초월적 돌파를 기조로 새로운 지각과 개념, 새로운 몸과 관계, 사회적 장치와 기술적 장치를 만들면서 스스로 그것들을 경험하는 일에 속한다. 동시에 실험과 경험이라는 재귀적 수행의 과정을 통해 상호작용과 형질전환의 새로운 운동을 구성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본질의 구현이 아니라 잠재성의 현재화와 더불어 또 다른 사회적 경험형식을 구성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건의 연쇄파동으로서 세계의 생성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끊임없는 충돌과 갈등, 마주침과 헤어짐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생성의 공동체는 무수한 사건을 낳고 낳게 할 뿐 그 사건들의 선악과 시비에 무관하다. 그의 궁극적인 관심사이자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적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우정의 공동체 또는 구원의 문제는 결국 윤리적 문제지 존재론이나 인식론의 영역이 아니다. 특히 그것들은 통일적이지도 연속적이지도 않은 사건의 연쇄 파동과는 다르다.
김상표의 작가적 고민은 이 지점에 놓여 있다. 현대 철학의 중심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은 본질상 우연이기에 우연의 예측 불가능한 작용 없이 독특한 상황을 예견할 수도, 연역될 수도 없다. 오직 사건의 실존에 대한 최종심의 명명과 진리에의 충실성을 통해서만 사무적으로 살아남는다.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어딘가에서 크고 작은 폭력과 전쟁의 위협에 죽어가거나 상처받고 있는 무수한 무구한 생명들에 대한 윤리적 과제에 무기력한 게 사실이다.![]()
김상표_눈먼자들의 폭력_캔버스에 유채_162.2×260.6cm_2026
다시 말해, 문명과 비문명, 장애인과 비장애인,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놓인 이러한 공동 윤리의 모색과 창출은 필연적으로 역설적 상황에 직면한다. 일체의 특권적이고 공식적인 것들을 거부하거나 단절을 꾀하는 아나키즘과 공동 영역으로서 윤리 세계의 추구 사이엔 넘어설 수 없는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아나키스트로서 작가의 목표가 결코 보편적인 관념에 포착되지 않는 절대 타자를 옹호하는 데 있는 것이라면, 행여 섣부른 윤리화는 본의 아니게 전체주의적인 폭력으로 귀결되거나 의심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김상표는 그러한 작가적 난제나 작품적 딜레마를 어떻게 돌파하고 있는가. 흔히 주로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드러내는 게 주목적인 수많은 ‘자화상’ 또는 그의 ‘얼굴성’ 탐구가 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다. 즉 그는 필시 경영학계의 뛰어난 학자에서 전문 화가로의 전격적인 전향에서 오는 불안과 고뇌의 시기를 거쳐 이제 어느 정도 성공적이고 힘찬 일련의 ‘얼굴’ 그림들을 통해, 단지 자신의 외모와 심리적 구성, 그리고 회화적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그에게 자화상이나 타인의 얼굴들은 단지 예술적 자기표현의 주요 수단이 아니다.
온통 ‘제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김상표 자신의 의지나 의도와 달리, 그것들은 ‘나’의 어떤 관념이나 이성에도 종속되지 않는 공동의 존재 양태 또는 공동의 존재 방식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다. 얼핏 오직 내면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자신도 모르게 실상 외부의 공간으로 열리는 탈존(ex-sistance) 사태를 보여준다. 또한 동시에 우리 모두가 외부의 타인으로 열리는 사건으로서 외존(ex-position)의 사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자기 고백의 성격을 띤다. 그의 작품 세계의 변화를 강제하는 외부적 요소는, 다름 아닌 바로 매 순간 예고 없이 침입하여 자신의 회화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사유방식을 뒤흔들면서 새로운 변화를 강제하는 이러한 자신의 타자로서 바로 ‘자화상’이고 ‘얼굴성’탐구였던 셈이다.![]()
시간의 정원2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5
김상표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에로티시즘 역시 그렇다. 근본적으로 에로티시즘이 자신의 몸을 통해 타자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거기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실상 그 자신의 근거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나아가, 좁은 의미의 남녀관계를 넘어 예술작품을 통한 정념의 표현과 소통을 의미하는 에로티시즘은, 실상 자신이 뭔가를 책임지는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 무엇인가에 내맡겨진 자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자신의 존재가 일정한 문화체계에서 관념적으로 규정된 관념의 존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연을 떠나지 못하는 존재임을 본의 아니게 폭로하고 있는 에로시티즘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되기1-3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5
최근의 작업에서 그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주체성이라고 할까. 무한하게 지속하고 생성하는 자연의 생기 과정 그 자체에 대한 본질 인식을 바탕으로 도시와 문명을 배제하기보다 그것들과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을 찾고자 하는 그의 노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단지 그것들은 물리적 자연이 품고 있는 거대한 역동(逆動)과 유동하는 세계의 생기적 사건을 자신의 예술적이고 정신적인 동력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안과 밖, 주체와 타자의 구분이 분명한 자기 동일적인 몸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연적인 생명들이 스스로 주장하도록 내버려 두려는 행위에 속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김상표에게 세계는 이성적 사유로 짜여진 개념들의 구조가 아니다. 조화의 기운을 일으키는 힘으로서, 마음과 그 마음의 집으로서 몸이다. 한편으로 휴머니즘의 본래적 회복을 통한 형이상학적 세계의 극복은 그것의 근거인 피지스(physis)로 돌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까닭에 김상표는 이성의 대립 개념인 감성 혹은 동물성에 이성을 해소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려 들지 않는다. 감성 역시 인간적이며 특히 이성이 그 속에 해소된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성을 본질로 하는 니체적인 초인성 또한 또 다른 의미의 플라톤적 사유의 변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존재를 가치화하는 사유야말로 <존재>에게서 그 본연의 존엄성을 약탈하거나 살해하는 최대의 타격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는 그는 정작 자신이 앞으로 어떤 그림을 펼쳐나갈지 ‘잘 모른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작가적 태도는 우리가 사는 세계는 생각보다 풍요롭고 복잡하며 역사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사실에서 온다. 동시에 모호하고 부분적이고 추상적이며 무엇보다도 명약관화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무엇보다도 참된 새로움은 ‘모호함’과 ‘혼돈’ 속에서 도래하며, 그때 예술가는 참된 새로움의 실존을 인정하고 공표할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에 기반한다.
주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 철학을 내면화하고 있는 김상표의 미학적 거점이자 작가적 생명력의 분출지는 바로 여기다. 그에게 작품의 과정이 곧 작품의 실재화다. 특히 그 가운데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물음이 하나의 과정을 대신하고 있다. 그의 회화 세계는 ‘물음이 실재고, 실재가 바로 물음’인 하나의 과정이자 상황이다. 그의 창조력은 인간의 목적론에 조율되지 않는 배음(背音, 背陰)으로서 이러한 과정과 물음에서 온다. 그리고 서로 어긋나거나 방해되지 않는 세계, 그러나 이상과 의미의 과다한 포만 상태에서 이탈하는 하나의 방법론이 아나키즘이라고 할 수 있다. ![]()
김상표_입맞춤은 사건이다1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5
그런 만큼 김상표의 작품들은 완성의 단계에서조차도 변화를 끝내지 못한다. 반복적으로 다시 시작의 원점으로 복귀하는 듯한 형상과 동작을 취한다. 때와 자리의 변동과 함께 끊임없이 자기 갱신(self-renewing)을 이루어 가는 과정적 존재를 지향한다. 상대적 완전은 없는 절대적 완성의 예술세계 속에서 역설적으로 끊임없는 자기 성찰만을 통한 ‘상대적 완전’을 추구해 가려는 노력이다. 생성의 맥동이 끊임없이 이어지는[生生不息] 가운데 비평형의 역동적 균형, 곧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이다. 그의 움직일 수 없는 작가적 개성은 무질서한 상태에서 에너지를 교환하는 개방계가 자기조직화를 통해 새로운 질서로 변환되는 이러한 비가역적 산일 구조(Dissipative Structure)에서 나온다.
작가 김상표는 중학생 시절 학교에서 겪은 어떤 상처로 한때 혐오하기까지 했던 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지극히 우발적이었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로 들어선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래서 자꾸 반복적으로 되물어 볼 수밖에 없는 ‘운명’의 결과다. 언젠가 죽어갈 수밖에 없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 맞이한 자신만의 ‘운명’이다. 동시에 자유로운 존재로서 그 결과에 상관없이 매순간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의 결과로서 ‘운명’이다. 그리고 이때 ‘운명’은 단지 미구에 들이닥칠 어떤 사건을 넘어선 이상한 힘이 아니다. 정작 한 실존적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의 자유의 기반이며, 작품 창작과의 완성과 개인적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는 결단력 또는 ‘존재에의 용기(courage to be)’를 뜻한다. ![]()
김상표_악의 꽃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25
솔직히 우리들에게 평온한 감상을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되레 관람객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김상표 교수의 그림 세계에 거는 기대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는 비판과 부정의 대상에 자신을 기꺼이 포함시키면서 그 비판과 부정을 오히려 타자에 대한 사랑과 구원, 자유와 운명을 하나로 통합시켜 간다. 나는 그 속에서 그가 자기 작품이 지닌 한계와 맹점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성찰이 먼저인 믿음직한 철학자 김상표와 예술가 김상표를 동시에 만난다. 행여 불안과 실패 같은 타자의 부정적인 면까지도 끌어안으며 끊임없이 거듭 갱신되는 김상표의 전복적 상상력이 주는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있는 중이라고 할 것이다. ∎임동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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