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타민=배진시기자]
야생의 거친 동물이 가축화되는 과정에는 철저한 인간 중심의 논리가 작용한다. 순한 동물이 대량 사육되어 먹거리가 되거나, 배변 훈련이 가능한 개와 고양이가 반려라는 이름으로 곁에 머무는 것은 그것들이 인간에게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이러한 효용의 잣대는 인간 사회 내부로도 칼날을 들이민다. 사회는 번식을 위해 아름답고 건강한 인간을, 풍요를 위해 노동 가능한 인간을, 정치를 위해 영민한 인간을, 그리고 유희를 위해 재주 있는 인간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규격에 맞지 않는 이들은 ‘불필요한 존재’로 분류되어 소외의 그늘로 밀려난다.
사회적 배제에 대한 공포는 인간의 본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생존의 기반이 취약한 아이들에게 소외는 죽음과도 같은 위협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두려움이 큰 아이일수록 먼저 타인을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연습을 시작한다. 내가 배제당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먼저 밀어내는 잔인한 생존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여자아이들은 차가운 눈빛과 날카로운 말로, 남자아이들은 거친 욕설과 주먹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하지만 타인을 깎아내려 얻은 안도감은 모래성처럼 허망할 뿐이다.
소외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단단한 자존감이라는 바위가 필요하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며 무리에 섞이기 위해 주위를 어슬렁거리지 않는다. 필자가 5세 아이들부터 오랜 시간 관찰해온 바에 따르면, 자존감의 증거는 명확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인내심, 흔들리지 않는 자기 신뢰, 그리고 타인을 굳이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빛날 수 있는 배려의 마음이 그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씨앗은 일부 타고나기도 하지만, 대개는 부모라는 토양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난다.
실제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말의 제어를 가르치다 보면, 아이의 언어 습관이 부모의 거울임을 절감하게 된다. 말조심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뒤에는 대개 거친 언사를 서슴지 않는 부모가 있고, 평소 집에서 핀잔을 듣고 자란 아이는 자연스럽게 친구에게 그 독설을 돌려준다. 아이는 부모의 입술 끝에서 태어나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완성되는 존재인 셈이다.
결국 아이에 대한 고민은 부모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내 아이가 누군가를 소외시키거나 혹은 소외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아이를 다그치기에 앞서 부모가 먼저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준엄한 일갈은 2,500년 전의 철학을 넘어 오늘날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실천적인 지혜가 된다. 부모가 스스로를 존중하고 언행을 가다듬을 때, 비로소 아이는 소외의 문법이 아닌 존중과 연대의 언어를 배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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