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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박영임 ‘설산(雪山)’..
문학여행

[수필산책] 박영임 ‘설산(雪山)’

신영규 기자 shin09ykkk@hanmail.net 입력 2025/10/20 21:07 수정 2025.10.20 21:18

[뉴스비타민=신영규기자]

△박영임 수필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이 하얗게 물들어간다. 멀리 보이는 설산에 직접 닿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의 목표는 덕유산 케이블카를 타 보는 것이다. 드디어 목적지에 닿았다. 케이블카 바로 옆 스키장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계절을 잊은 듯 인공눈으로 가득한 슬로프 위를 스키어들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입춘이 지났고, 내일이면 3월의 첫날이다. 경칩도 코앞인데 이곳은 아직도 눈으로 뒤덮인 한겨울의 풍경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1,520미터 설천봉에 내렸다. 산 전체가 흰 눈으로 덮여 그 아름다움에 절로 감탄사가 흩어진다. 곤도라를 타고 오르내리며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한 폭의 수채화 같다.
  눈보라를 견디고 한겨울을 버티려면 몸이 뚱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곳 나무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듯하다. 칼바람을 피하려고 먹는 것도 줄여 쓰러질 듯 가냘픈 몸으로 겨울을 견딘다. 옷을 다 벗어 던진 나목으로 서서, 그렇게 버티다 보면 봄이 온다는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인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눈 덮인 산뿐이다. 마치 「겨울 왕국」의 엘사가 아직 마법을 풀지 않은 눈의 나라에 와 있는 듯하다.
  오늘 설산의 비경을 볼 수 있다는 건 참으로 특별한 행운이다. 눈 위를 걸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대피소는 그대로였지만, 소중한 문화유산인 팔각정은 화재로 전소되어 형채도 없었다. 그 잔해 앞에서 멍하니 서 있다. 햇빛과 흰 눈이 맞부딪혀 반사되는 빛은 마치 용광로처럼 눈부시다.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다.
  덕유산 정상에 가려면 이제부터는 걸어야 하는 구간이다. 눈앞에 펼쳐진 항적봉과 맑은 하늘이 잘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오늘의 목표는 여기까지라며 발길을 돌리려는데, 아쉬움이 자꾸 발을 붙잡는다. 조금만 더 오르면 정상이라는 생각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하지만 장비 없이 설산에 오르는 것은 위험할뿐더러 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최소한 스틱이나 아이젠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장갑까지 차에 두고 왔으니 단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마음이 자꾸 발길을 멈추게 한다. ‘준비가 안 되었으면 어때, 가다가 힘들면 쉬었다가 돌아오면 되지.’ 마음속 유혹이 속삭인다. 유혹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결국 한 발 두 발 눈 위에 발을 내딛는다. 초입부터 종아리까지 파묻히는 눈길이다. 오랜 겨울 동안 쌓이고 또 쌓인 눈이 녹았다 얼며 단단한 누룽지처럼 굳어 있다. 발빝에서 ‘뽀드득’ 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 위로받으며 천천히 오르다 보니,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견딘 나목과 희나리 앞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드디어 우리나라 10대 명산 가운데 하나인 덕유산 정상에 올랐다. 향적봉 해발 1.614미터의 돌기둥이 반긴다. 바위로 둘러싸인 정상에서 발을 쿵쿵 구르며 그 존재를 확인한다. 이곳에서 발원한 옥수가 흘러 구천동 33경을 이루며 아래로, 더 아래로 흘러간다. 삶의 원천이 되어 주는 그 물길에 고마움을 느끼며 신발에 묻은 눈을 털었다. 주봉이라 불리는 정상 둘레를 천천히 돌아본다. 아직 눈으로 가득한 산도 있지만, 반대편에는 어느새 눈이 사라진 풍경이 보인다.
  아득히 보이는 눈 덮인 산과 하늘이 닮았다. 크고 작은 돌무더기가 신비롭다. 해가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알 수 없지만, 산의 형세를 보니 방향이 대충 짐작된다.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만큼 편안하다. 이대로 잠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눕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맑던 하늘에 연회색 구름이 살포시 태양을 덮는다. 그 친절함에 웃음이 난다.
  “구름아, 고마워. 하늘도 고마워.”
  바람 한 점 없는 고요 속에서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 마음이 따뜻해진다. 오늘 같은 유혹이라면 기꺼이 빠져들고 싶다.
  아주 오래전, 이곳을 처음 올랐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1981년도 겨울, 유난히 추웠던 그해, 산을 좋아하는 지인을 따라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올랐던 곳이 바로 덕유산이었다.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눈을 헤치며 앞사람을 놓칠세라 땀을 뻘뻘 흘리며 능선을 종일 걸었다. 그때의 기억이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삶의 고비마다 버티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바로 그때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 같다. 지금은 그 시절처럼 배낭을 메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를 갈아타며 등반할 기운은 없지만, 편리한 승용차와 케이블카로 오르는 산행에도 또 다른 만족이 있다.
  머지않아 눈 덮인 이곳에도 봄이 찾아올 것이다. 진달래와 철쭉이 피고, 나목이 초록으로 갈아입을 여름이 오고, 불타는 듯한 단풍으로 물드는 가을이 오리라. 어느 계절이 더 아름다운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산을 다시 찾아오고 싶다.

 
박영임 수필가는 2005년 계간 『문예연구』로 등단했으며, 2008년 한국농촌문학작품상과, 2024년 《문예연구》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전북문학, 문예연구문학회, 순수필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으로 『조롱박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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